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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각해보자

가스라이팅을 당했다.

온세상 2021. 10. 10.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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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당시 중학생이였다. 20대 중후반의 나이였던 그 사람은 우연히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알게 되었다. 당시 여러가지로 약해졌고 힘들어하던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고 나 또한 그런 그를 응원하며 하루종일 메세지를 주고 받을 정도로 가까이 지냈다. 친구같은 관계였다.

물론 선을 항상 지키려 노력했다. 나는 애초에 인터넷에 관해서는 굉장히 보수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기에 사진은 물론 실명 또한 절대 알려주지 않으려 했다. 그에게 많은 정보를 공유하였지만 익명의 관계였고 나는 그걸 무조건 유지하려 했다. 그가 가스라이팅을 하기 전까진.

항상 친절하고 다정했던 그는 이따끔 180도 변했다. 나에게 실명을 알려줄 것을 요구했고, 익명이 아닌 개인 카톡 프로필을 보내줄것을 요구했으며, 전화를 하길 요구했다. 그리고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자살 협박을 했다.

'역시 나 같은 존재는 죽어야 마땅해. 혼자 고독사를 해 구더기가 몸을 파먹고 몸이 썩어 악취가 진동을 한 후에도 사람이 찾아오지 않을 거야.' '나 같은 건 역시 안돼' '이제 곧 죽으려고' '너무 죽고 싶어' '나 지금 울고 있어'

온갖 자기 비하와 자살 예고. 나는 그에게 받은 만큼 위로해 주려 노력했지만 그게 될리가.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나는 소용돌이에 휘말렸고 죄책감과 우울감에 너무 힘들었다.

'그렇게 도와줬는데 이름 하나 알려주기 어려워?' '나를 위해 이렇게 시간을 써주고 도와준 사람한테 내 정보 하나 알려주는 게 어려워?' 스스로도 혼란스러웠다.

나는 그냥 너무 무서웠다. 그 사람이 죽지 않길 바랬다. 내가 나쁜 영향을 주고 싶지 않았다. 원래도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인데, 나까지 이러면 정말 죽는 거 아닌가. 싫었다. 너무 무서웠다. 관계를 끊고 싶었지만, 그 사람이 충격을 먹고 목숨을 끊을까봐 그러지 못했다.

죽지 말아. 제발 죽지 마.

계속 되는 요구. 계속 되는 협박.
나는 결국 그의 요구를 들어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숨길 수 없었던 그의 더러운 본색.
20대 후반의 나이였던 그는 중학생이던 나에게 사귀고 싶다고 했다.
전화에선 내 목소리가 섹시하다고 했다.
만나자고도 했었다. 나중에 꼭 직접 만나자고.

폰을 볼때마다 몸이 떨렸다. 밥을 먹다가도 핸드폰 알림이 울리면 소화가 되지 않아 계속해서 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고, 원래도 가지고 있던 신체적인 증상이 너무 심해졌다. 이명이 너무 심했고 숨쉬기가 어려웠다. 눈 앞은 아른거리고 가슴통증은 온 몸을 관통했다. 평생 해본적도 없는 조퇴를 밥 먹듯이 해야했고, 매일이 괴로웠다.

죄책감. 정말 그놈의 죄책감과 불안함에 미칠거 같았다.

결국 나는 인터넷을 쓰지 않는다는 핑계로 그와 시간을 두기로 했다. 그러고는 사이트를 탈퇴했다. 이 과정을 밟는 동안에도 너무나 불안했고 무서웠다. 혹시 알아채지 않을지. 눈치 채지 않을지. 내가 또 무슨 개인정보를 흘린 것이 아닐지. 개인정보로 스토킹 하지는 않을지. 혹시 자살을 하지는 않을지.

연락을 끊고 난 후 몇 개월 동안은 계속해서 죄책감과 불안함, 그리고 그를 향한 연민에 시달렸다. 그래도 나에게 도움을 많이 주었는데. 정말 진심이었던거 같은데. 내가 그렇게 한게 맞았을까. 죽은 거 아닐까. 자살한 거 아닐까. 그럼 나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우울증이 조금씩 나아지고, 맑은 정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을 때, 그가 했던 행동들이 가스라이팅이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그 당시 얼마나 어렸는지. 그의 의도가 얼마나 불순했는지도 알아차리게 되었다.

너무 화가 났다. 대체 어떻게 어린 학생을 상대로 자살 협박을 했을까. 어떻게 중학생을 상대로 연애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까. 어떻게 그럴수 있을까. 사람이. 분노에 온 몸이 떨렸다. 너무나도 혐오스러웠다. 내가 더러워진 기분이였다. 그가 끔찍이도 싫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항상 마음 한 쪽 구석에서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나 때문에 잘못되지 않았을까. 내가 정말 뭔가 잘못 건드린게 아닐까. 정말 나 때문에 무슨일이 생긴게 아닐까. 내가 그렇게 떠나도 되는 거였나. 아직도 나를 스토킹하지 않을까. 내 개인정보는. 내 이름은 어떻게 되는거지. 너무 무서운데. 어떻게 해야할까. 왜 그랬을까. 왜 정보를 주었을까. 왜 사적인 이야기를 한걸까. 왜 그랬을까 왜.

나는 솔직히 아직도 두렵다. 그가 이 글을 볼 까봐 두렵다. 완전히 잊고 싶었지만 가끔 생각이나서 분노하며 동시에 불안감에 휩싸인다. 그만하고 싶은데, 생각을 그만두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된다.

하지만. 그렇지만 좋게 생각하려고 한다. 좋게 좋게. 가스라이팅 예방 접종을 맞은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그러고는 다짐한다. 앞으로는 어떤 상황에서든 가스라이팅은 당하지 않겠다고. 내 스스로의 영혼을 썩혀가며 남을 살려야 하는 상황이 있다면 그건 뭔가가 잘못 된 거라고.

덕분에 얻은 게 또 있다면. 의심. 의심을 더 얻었다. 또한 온라인 상의 관계를 현실세계로 들이지 않을 것. 어떤 일이 있어도 온라인에 신상을 드러내지 않을 것. 내가 상태가 좋지 않을때에는 나와 비슷하게 정신건강 상태가 좋지 않은 사람들과는 긴밀해지지 않을 것 등. 전보다 더 보수적이게 변했다. 혐오스러운 경험이였지만 그래도 얻어가는 건 있다고. 그러니 괜찮다고 이제는 스스로를 위로한다.

혹시라도 나와 비슷한 상황에 있는 사람이라면. 제발. 제발 관계를 끊었으면. 자살협박 등으로 끊기 힘들다면 도움이라도 받기를. 제발. 도움을 청하기 힘들다면 청소년은 1388(청소년 사이버 상담센터), 성인은 1577-0199(정신건강 위기 상담전화) 으로라도 도움을 받아야 한다.

관계가 나에게 독이 되서는 안된다. 스스로를 죽이는 행위는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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